나치 역사의 반복인가, 하나님 왕국의 부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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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역사의 반복인가, 하나님 왕국의 부흥인가?

우리는 가끔 주위 환경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그 환경을 거의 알아채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아름답고 추한 것들에 지나치게 친숙해지게 됩니다. 서구권에서는 그 기원이 계몽주의 – ‘하나님’ 대신 ‘이성’과 ‘지식’을 숭상하는 18세기 철학•지성 운동 –인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수 세대가 태어나 살다가 죽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이 없는 ‘도덕적인’ 인류라는 개념에 대해 말할 때 ‘세속적 인본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속적인 세계에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우리가 다니는 초중고교, 대학교, 사업체나 정부에 계실 자리가 별로 없습니다. 세계화된 사회와 현대 대중매체로 인해 이제 이 세속적 체제는 서구권 너머까지 확대되고 있습니다.

예슈아 당시, 문제였던 사두개인들은 천국이나 초자연적인 것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인간 중심적이었는데, 이는 ‘세속적인 인본주의자’의 초기 형태입니다(마태복음 22:23-33에 나타난 결혼과 부활에 관한 예슈아의 가르침  참조). 마찬가지로 문제였던 바리새인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그들은 천국을 믿었습니다.

예슈아께서는 오셔서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 모두 흔들어놓으셨습니다. 그분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할 때는 이 세계에 있는 인간인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 있지만,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때는 우리에게 천국과 초자연적인 것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슈아께서는 정말로 “사람의 아들”이시기도 했고(마 8:20; 9:6; 11:19 등), “하나님의 아들”이시기도 했습니다(마 27:43; 눅 1:35; 요 1:49-50 등).

타협 없음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독일에서는 루터교회가 국가 종교를 장악하고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루터교인들이었습니다. 비극적이게도 히틀러의 나치당은 이 교파가 영향을 미쳐  침투하고 장악하기 쉽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타협하지 않은 채로 남아있던 교파는 성경 중심의 ‘고백교회’였습니다.

고백교회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그의 책 <윤리>에서 “이원론적으로 생각한다”고 루터교인들을 비난했습니다. ‘저차원 혹은 땅의 영역’은 사업, 정치, 행정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고차원 혹은 하늘의 영역’은 기도, 예배, 교회출석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루터교인들은 오로지 고차원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어, 나치에게 저차원의 영역을 장악할 자유를 주었다고, 즉 ‘그들은 너무 하늘의 영역에 착념하여 땅의 영역에서 전혀 선하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나치가, 예를 들자면, 유대인의 사업체를 몰수하고 유대인들을 사회에서 하찮은 존재로 만들고 결국에는 가스로 질식사시키는 데도, 루터교인들에게는 대응할 만한 신학적 근거가 거의 없었습니다.

놀랍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인본주의적 세계도 거대한 악의 잠재력을 지닌, 나치와 유사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적인 믿음과 유대-기독교 가치들은 하찮은 것으로 치부되고, 비방을 당하고, 종국에 가서는 그 옹호자들인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과 국가는 박해를 받습니다. 사두개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 체제는 ‘땅의 영역’에만 관심을 가지며, ‘하늘의 영역’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대응

오늘날 가지각색으로 표현하고 있는 전 세계 메시아의 몸은 적어도 다섯 가지 방식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첫째, 우리는 ‘지금 여기’에도 ‘영원’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반드시 두 ‘영역’ 모두에 동시에 서 있어야 합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막 12:17). 우리는 정치, 사업, 생명윤리, 성(性)과 관련된 문제, 빈곤, 환경 등에도 영향을 끼치고 관여해야 하며 기도와 예배, 전도도 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하찮은 존재로 밀려나거나 침묵당하고 있기 보다는, 공론화의 장을 열어 사탄의 왕국이 스스로 분열하여 무너지게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3:6에 기록된 것처럼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의 유대인 지도자들과 논쟁하게 되었을 때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심문을 받는다’고 표명했습니다. 그는 사도행전 24:21에서 세속적인 로마 정치지도자 앞에서도 또 다시 그 주장을 했습니다. 물론, 바울은 땅의 영역에 대해서도 신경을 썼지만, 사두개인들과 로마인들에게 하늘의 영역을 생각하도록 도전하며, 예슈아를 대적하던 자들을 분열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셋째, 어쩌면 그 폭력성이나 불완전함 때문에 자기 종교에 불만을 갖게 되는 다른 종교 사람들에게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많은 무슬림들이 그냥 세속화되며, 그들 종교의 ‘하늘의 영역’에서 곧장 종교가 없는 ‘땅의’ 영역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예슈아께서는 제3의 진짜 대안이 되어 주십니다.

넷째, 우리는 “주님의 손을 뻗어 병을 고치시고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하며, 하늘의 영역을 여기 지상에 보여주기 위해 행동이 뒤따라야 합니다.

이렇게 행할 때, 우리 지역사회와 도시에 부흥이 일어나는 일이 앞당겨질 것이며, 심도 깊은 국가적 변화가 가능해지고, 하나님의 왕국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도’ 임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마 6:10). 그래서 우리의 다섯째 행동은 이러한 것들의 관점에서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드리고, 응답을 바라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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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 2019-11-04T14:02:15+00:00 11월 1st, 2019|분류되지 않음|0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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